2023. 2. 9. 08:44ㆍ카테고리 없음
이중섭 산책로를 따라 걷는 중에 눈에 뜨이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서귀 본향당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곳은 지난날 서귀포에 살던 사람들의 신앙의 귀의처로서 본향을 모셨다 하여 '서귀본향당(西歸本鄕堂)'이라 부른답니다.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과세문안대제와 2월 13일에는 영등 손맞이제 그리고 7월 13일에는 마풀림제, 12월 13일에는 동지제를 지낸답니다.
이곳은 고산국 곰보여자에 대한 사연이 있는 곳으로 서홍동과 서귀동, 동홍동 지대가 서로 나누어지고 서로 혼인도 하지 않는 원수지간이 된 마을사이의 불화를 신의 행위로 알고 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지금은 세태가 변하여 전처럼 많은 주민들이 찾아가지는 않고 있으나 일부 주민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중섭미술관 옆 골목안쪽에 있습니다. 이곳의 주민들의 삶도 엿볼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중섭 미술관은 방문하지 않고 예전에 여기 잠시 살던 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 가랑비가 오는 날 산책하여 봅니다.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남 평원에서 출생하여 1956년 9월 6일, 서울에서 사망 했습니다.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으로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답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고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던 근대미술의 거장입니다.
초기 작품에서는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향토적인 주제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나 그 뒤로는 피난시절 가족과의 생활,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 등 생활일기와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답니다. 그의 예술세계는 철저하게 자신이 처한 삶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 개인적 삶의 고뇌를 지극히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한 시대의 아픔을 잘 표현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대향 이중섭 화백이 서귀포시에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이 고장 인심을 소재로 하여 서귀포의 정서를 표현하는 작품들이 이곳의 미술관에 전시 되어 있습니다.
약 1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그의 서귀포 체류는 그 후 대향 이중섭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답니다.
가장 한국적인 작가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 받습니다.
1951년 피난시절 서귀포생활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행복했다는 이중섭화가는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부두노동자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서울에서 개인전도 열었던 그는 아쉽게도 서울에서 만 40세로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야수적인 강열한 색감 속에 향토적인 숨소리가 있는 작품으로 그림 앞에 서게 되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묘한 힘이 있습니다.
겨우 방 한칸에 2명이 눕기도 좁은 그곳에 한국미술사에 남을 소중한 작품을 남겼음을 보고 그 처절하고 고뇌에 찬 천재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를 맞고 외롭게 서귀포 앞바다를 처다 보는 눈이 무척 애처롭군요, 우산을 한참이나 받쳐주면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쓸쓸한 작가의 마음을 아는지 하얀 동백과 하얀 목련이 피기 시작 합니다. 노란 수선화와 봄을 알리는 영춘화도 봄비처럼 내리는 비를 흠뻑 맞고 미소를 지어 주네요.
천천히 걸으며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길입니다. 항상 북적이는 곳인데 오늘은 너무 조용하고 한산합니다. 이런 곳에 오시는 관람객들은 가급적 조용히 떠들지 않고 작가의 느낌을 얻어 갈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걸으며 이곳을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