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과 백두산여행

2022. 12. 4. 13:1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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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백두산 여행 

 

 

 

1. 북경을 향하여

 

 그 동안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주변의 등산 동호회를 통해 그렇게 가보고 싶어, 준비하고 기다림에 잠 못 이루다 91일 출발 날짜를 잡아 아침 6 전주시청 민원실 앞에서 청주 공항을 향하여 출발했다. 청주 공항에 도착하여 11 40분발 중국 심양 행 북방항공 비행기에 탑승하여 승무원의 안내를 받고 나의 좌석에서 이륙의 기쁨을 맛보았고 기내의 중국 승무원의 중국 고유의 의상이 매우 인상적이고 예뻤다.

 곧 이어 나온 기내식은 빵과 닭튀김으로 비교적 기름기가 많아 보이지만 처음으로 먹어보는 중국음식을 맛있게 먹고 탑승선물로 병 따개을 받았다.

 심양 까지의 시간은 약 1시간 가량 소요 되는것 같았고 중국시간은 우리나라 보다 1시간 쯤 늣다. 비행기 안에서 중국 대륙을 보니 산과 평야의 거대함을 똑똑히 볼 수 있었고 정말 넓고 광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1 50 경에 심양에 도착하게 되었고 곧 바로 입국수속을 마친후 북경발 비행기 탑승수속을 한후 처음 보게 되는 중국공항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화장실은 정말 낙후되어 있었다.(화장실을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음) 외국인과 내국인이 동시에 이용하는 화장실을 좀더 개선하여 처음 중국에 오게 되는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에게 좋은 인상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나라 공항의 화장실은 정말 깨끗하고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비행기의 이착륙에 너무 좋은 맑은 날씨였다. 공항 내부 시설은 이곳이 국제공항인가 싶을정도로 초라하고 시설이 오래되어 보였다. 그런 이유는 바로 옆을 보니 신청사가 지어지고 있었고 이제 중국도 문호를 개방하여 국제적 위상이 깎여지지 않도록 시설에 신경을 쓰는 듯 싶었다.

 공기도 뿌옇고 흐려서 한국의 맑고 청하 한 하늘이 문득 생각이 났다.심양의 모습은 60~70년대 우리한국의 모습과 비슷했고 모든 건물이 회색페인트 도색에 화려함이 없고 판매점의 아가씨 또한 밝은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북한비행기 승무원들을 보았고 그들은 기념품을 사고 있는듯 했다.중국의 현재 기온은 높은 편으로 내륙성기후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오후220 북경발 비행기에 탑승하고 중국 여성들을 보니 골격이 작고 아담하여 예쁜 편이었다. 40분 경 심양을 출발한 보잉2329편 비행기는 북경을 향하여 힘찬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비행기에서 북경으로 가는 동안 창밖을 보니 드넓은 평야에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처 져 있었고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자리잡고 있기에 인구밀집으로 형성된  많은13억 중국인구가 존재할수 있는 이유를 알수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드디어 벌써 북경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과연 아시아 대륙의 북경공항은 크고 웅장하여 국제공항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99 9월에 신공항으로 개축하여 100여개 나라에서 취항하고 있으며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치르고 있는 중인지 몰라도 내부시설이 너무 깨끗하고 잘 갖춰져 있었으며 많은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공항에 나와보니 북경 23일 동안의 현지가이드로 흑룡강성 출신인 키가 조그만한 조선족 정채만 이라는 이름의 가이드가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이드의 할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홍천 출신이고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여 태어난 동포2세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18.5km로 주변에는 백양나무(포플러)와 측백나무가 심어져 거리의 삭막함을 다소 달래 줄수 있었고 차도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나 기후가 덥고 하늘은 뿌연 회색빛 이었다.(우리나라의 코스모스 핀 가을하늘은 비교가 될수 없었다)

 

2. 하늘신을 숭배하는 천단공원에서

 

 시내를 들어 가기전에 우리는 천단공원을 향해 가기로 했다. 천단은 명나라와 청나라가 하늘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곳으로 명나라의 영락황제시대에 건립되었다 하며 청나라의 건흉황제시대에 개축되었다고 한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일단, 월단, 천단, 지단이 대칭 위치로 건립되어 각각의 신이 모셔져 있으나 황제가 직접 제사를 지내는 곳을 천단이라 하여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모신다.중국의 옥으로 장식되어 있고 황제가 기우제를 지내는 곳과 (북경에는 비가 적고 매우 매마름) 오곡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

 가축을 제물로 하여 가축이 타는 냄새와 연기로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을 알려 풍년을 기원 했다한다. 제를 올리는 중심에 있는 둥근원형의 돌은 옥으로써 천심석이라 하여 하늘과 통하는 중심에 있는 석이라 하며 그 중요함을 더했고 중앙 통로 바닥에 옥으로 꾸며진 길은 황제만이 유일하게 (황태자 태후등은 않됨) 걸을수 있는 길로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기도 한다.

 뒤쪽에 큰 건물은 일종의 법당 같은 곳으로 하늘신을 모시는 곳이라 한다. 천단공원 주변에는 500년 이상 되어보이는 측백나무들이 마치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하고 있고 구용백이라 하여 9마리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만 같은 형상의 측백나무가 매우 인상적이었다.(구용백은 북경시 지정나무로 보호하고 있음) 북경에는 몇개의 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으나 이곳 천단이 규모가 제일 큰 제단이라고 한다. 공원에서 중국인들이 여럿이 모여 노래를 열심히 부르며 여흥을 즐기는 모습과 진지하게 이를 지켜보는 구경꾼 모습이 매우 인상적 이었다.

 

3. 북경거리의 모습

 

 숙소로 오는도중 북경 길가를 보니 정말 자전거도로가 잘되어 있음을 볼수 있었다.인구가  많다 보니(북경1300만인구) 경제성으로 보나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잘 이용하고 있었다.비슷한 서울의 경우를 보면 차량의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으니 우리도 한번 교통 문제에 대해 심각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것 같았다.

 오후 630분경 북경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가 있게 되어 북경음식을 처음 먹게 되었다.이름은 알수 없지만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많았고 잉어는 통째로 쪄서 상에 올려저 있고 만두며 볶음요리가 참 맛이 좋았으며 함께 내어 놓은 자스민차는 중국의 향을 맛볼수 있었다.그러나 향신로가 많이 첨가된 음식은 입맛에 맛지 않았다.

 식사중에는 무희들이 나와 춤과 노래로 한층 분위기를 즐겁게 했고 중국의 전통의상과 중국여인들의 예쁜 모습에 반하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후 우리 일행은 북경서커스를 관람 하기로 하고 서커스장에 도착했다.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있어서 그런지 외국인이 관람객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듯 했다.서커스는 정말 기량이 수준급이고 재주가 뛰어나 중국에서 세계를 향해 자신 있게 소개 할만하다고 생각 되었다. 저런 적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훌륭한 기량이 나오는지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그 화려함 뒤에서 피나는 노력과 열심을 다했다는 걸 느낄수 있었으며 감탄과 즐거움에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4. 북경에서의 첫밤

 

 우리는 화운호텔이라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화운호텔은 21층건물로 그래도 북경에서는 외국인을 맞이하는 좋은 호텔이라고 가이드는 말했다. 방배정을 받고 북경에서의 하룻밤을 청하기로 했다. 잠자리와 창밖 북경의 밤거리는 참으로 좋았고 북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그냥 먹지는 못하고 샤워하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그래서 이곳 북경시민은 우리의 보리차처럼 끓인 물에 익숙해 있고 항상 휴대하고 다니며 마시기도 한다.

 우리 70~ 80년대 그리고 90년대에는 가정에서 보리차를 즐겨 마시고 생수는 요 근래 마시기 시작하고 있어 요즘 우리는 익숙하지만 호텔에서 물이 귀한것을 느끼게 되었다. 호텔에도 물을 제외한 물품을 비치하고 있는데 비교적 품질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특히 화장지는 우리나라의 재생용지와 비슷하다)

 고단하지만 기대감과 여행의 흥분함에 쉽게 잠을 이룰것 같지는 않았지만 북경에서의 첫밤. 내일을 위하여 단잠을 청하기로 했다.북경의 첫밤 단잠을 이루긴 했지만 깊은잠을 자지 못한 까닭에 아침 3시 반에 잠이 깨여졌다.

 세면을 한후 오늘 여행할 간단한 물품을 소형배낭에 담아 이것저것 짐을 꾸리고 옷을 입은채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기다가 아침 동이 트는걸 보게 되었다.

 아침식사는 호텔식으로 부페로 준비되어 있는데 외국인을 배려해서 인지 빵종류 요리가 많았고 특이 한것은 콩을 재료로한 요리가 많이 있었던것 같다. 손가락 만한콩. 땅콩같은 것과 아주 적은콩등을 중국의 고유한 향신료를 사용하여 먹음직하게 내어놓고 중국만두,볶음야채등으로 먹을거리가 풍부한 아침식사 였다. 중국 고유차와 함께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고 오늘 첫일정인 명13인릉을 향하여 출발했다.

 

5.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명13인릉으로

 

 북경의 아침거리 풍경은 안개가 많고 일요일 주일이라서 쉬는날인 관계로 비교적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일제 중고차들이 많고 한국 국산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여러개의 자동차 회사가 있지만 왜 중국에 진출하기가 어려운지 알수 없었지만 이후로 우리도 무역거래의 긍정적인 면을 검토하여 세계각국을 우리나라 자동차가 여러곳에 누비고 있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집단으로 자전거를 몰고 출근을 하는 모습은 절약하는 모습을 보는 건지 경제가 어려워서 그러는 건지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아무튼 기름소비보다 운동을 겸할수 있는 자전거 출근은 적극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13인릉은 북경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에 있고 가는 도중에 중국공산품 생산공장에서 옥을 가공하고 있는곳을 방문하기로 했다.입구에 옥으로 제작한 말과 복숭아를 보고 중국이 옥으로 유명한 곳이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이곳은 옥돌생산에서부터 가공 판매 관람 들을 순차적으로 할수 있도록 모든것을 준비해 놓은 곳이라 생각 되었다. 옥으로 만든 장식물 장신구들을 보며 그 솜씨와 재주들이 나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고 옥팔찌 두개를 골라 구입했다.

 옥생산 공장을 나선후 20분정도 가다 보니 명13인릉에 도착 할수 있었다.13인릉 주차장 주변에는 과일점과 잡상인들이 많았고 주변엔 온통 복숭아 밭이 있었다.(복숭아원산지가 중국 북경부근이라고 함) 삼국지의 도원결의의 배경이 복숭아 밭에서 이루어 진것을 새삼 느낄수 있었다.

 13인릉(명나라 황제13)의 입구에 들어서니 비석에 비문이 없는것이 특색 이였는데 황제들은 너무 치적이 많아 그 많은 치적을 비문에 다 옮겨 놓을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가이드는 황제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무관심하고 그 치적을 특별히 기록할게 없었고 황제 자신을 위해서만 모든 정사를 이루게 되어 비문이 없다고 했다.

 13인릉은 연산산맥 줄기 팔달령에 이어진 산기슭에 위치한 명나라 시대의13릉으로 200여년에 걸쳐 역대의 황제 헌,,,,,,,,,,,,덕의 13개 황제의 릉이 있는 곳이다.

 이중 개봉된 능은 장릉과 정릉 두개의 릉이고 내가 본 정릉은 10살때 황제에 등극하여 48년동안 통치하던 제13대 신종 만력제와 그의 두황후가 잠들어 있는 릉으로 릉의 규모는 장릉 다음으로 크다. 정릉은 6년간의 긴 공사 끝 1957년에 지하궁전을 발굴 하였다 한다.

 48년간 통치하면서 지하궁전을 완성한 황제의 사후세계에 대한 욕심을 읽을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릉의 안쪽은 지하 20m에 넓이는 약 47m이며 길이는 88m의 규모로서 지하궁전을 돌아볼수 있도록 통로가 설치되어있다. 내부의 보물은 다 발굴하여 박물관에 보관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에 빛을 보게된 황제의 관만(돈과 같이 묻었다함) 관람객들이 던진 지폐와 동전들 속에 갇쳐 있고 죽게되면 사용 할수도 없는 제물의 한계를 교훈으로 보여 주는것 같았다.

 석굴로된 지하의 온도는 매우 낮고 붉은 나무 관속에 파라핀으로 함침된 신종황제는 옥석으로 만든 옥관속에 있고 앞쪽에 있는 항아리는 기름항아리로 속에 기름을 채워 불을 피우므로 주변 산소를 희박하게 만들어 시신의 부패를 막고 오래 보존할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입구의 석문의 문틀은 9개의 돌로(9는 황제 만의 쓸수 있는 숫자) 되어있고 성문은 한개의 옥돌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큰 성문을 만들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금 할수 없었다.

 우리와는 92년도에 한중수교가 이루어 졌고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민족간에 편견은 없으며 북경의 1300만명이라는 인구가 서로 상부상조하여 가며 사는 모습이 중국이라는 큰 대륙을 이루고 있는 큰 국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6. 중국의 자존심 만리장성을 향하여

 

 점심 식사후 칠보공예가 유명한 상점으로 가게 되어 중국인들의 손재주를 감상 할수 있었고 예쁜 딸을 위해 중국 자수가 놓여진 핸드폰 주머니를 구입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들뜬 마음과 함께 TV에서나 책속에 소개되어 오고 달에서도 그모습과 윤곽이 뚜렸이 보인다는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만리장성의 그 길이는 실제로는 12000(중국에서 1리는 5Km)로 그 규모가 엄청난다 라는 가이드의 말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그 만리장성의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입구에서 케이블카로 만리장성에 오르게 되었고 그곳은 세계문화 유산으로써 전 세계적인 유명한 곳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었다.

 2000년 전에 축성된 만리장성은 인공위성에서도 볼수있는 유일한 건축물로써 그 규모가 엄청난다고 한다. 진시 황제가 중국을 통일 시킨후 30만명의 군사와 수백만명의 백성을 징발하여 6개의 나라에서 산발적으로 쌓여져있던 성들을 연결하여 현재의 만리장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만리장성의 동쪽 깃점은 요동반도에 속한 산해관이고 서쪽의 끝나는 지점은 실크로드의 입구인 자위관으로 총길이6780Km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관광할수 있는곳은 연산산맥의 팔달령 장성 일원으로 북경에서는 약70Km 쯤 떨어져 있다.

 이곳을 사람이 걸어서 완주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한다. 아직 완주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평생을 받쳐 완주할 사람이 한국에서 나온다면 중국의 기백을 꺽고 한민족의 자긍심이 중국을 지배할지도 모를텐데.......(한국에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산악인이 여럿 있음) 그건 나의 생각에서나 가능한 꿈같은 이야기이고 더위와 따가운 햇볕때문에 만리장성을 뒤로 하고 하산을 재촉 하였다.

 

7. 소계림으로 그절경이 빼어난 용경협(龍慶峽)

 

 오후320 경 우리는 세계문화유산을 뒤로 하고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는 용경협을 향해 출발했다. 용경협으로 가는 거리의 풍경으로 가옥은 지붕과 벽 모두가 적벽돌로 지어져 있고 주민들의 일하는 모습과 집단 농장의 토지들은 사회주의 냄새가 가득하였으며 수양버들이 늘어진 그늘에는 옛 시골의 모습처럼 한가롭기만 했다. 시가지 외각에는 개혁의 물결이 들어와 아파트들이 건축중이고 사회주의 국가의 변화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붉은 현수막과 붉은 간판이 공산주의의 사상과 투쟁 심리를 자극하여 그동안 하나의 통일된 중국공산주의를 유지 했나 싶었다.

 환상의 백양목 나무 터널에는 야간운전을 위해 나무밑둥 줄기에 하얀색 페인트로 가드레일 표시를 해둔것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용경협 가는길은 도로가 좁고 주변에는 넓은 옥수수밭과 수수밭이 펼쳐 있었으며 40분의 달렸을까 평원을 가로막는 절벽같은 산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길양옆에는 복숭아 나무들이 열병하듯 늘어서 있었다.

 어느새 중국 전통 양식의 대문이 있는 광장에 도착했고 대문 앞에서 눈을 들어 산등성이을 보니 용경협이라는 거대한 글자가 한눈에 들어오고 중국지도자인 강택민의 이름도 함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소문으로 듣던 용경협인 것이다.

 빵차라는 소형차를 타고 용경협 입구에 들어서니 시원한 협곡의 기운이 내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소계림이라는 별명을 지닌 숨겨진 명소로 북경에서 먼시간을 가야하는 계림에 가지 않아도 그 절경을 일부나마 이곳에서 즐길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명나라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용경협은 어느 황제를 위해 협곡을 막아 만들어 놓은 절경이라고 전해지는데 중국 정부가 근년에 들어 관광 명소로 개발한 곳이다.(강택민 시대에)

 협곡을 따라 모퉁이 길을 돌아 나가다 보니 20층 높이(72m)의 거대한 댐이 보이고 승천하는 두마리용으로 만든 돌기둥 문을 통과하자 용 꼬리 부분에 설치해 놓은 에스칼레이터 여섯번을 갈아타고 용 주둥아리 부분으로 빠져 나오자 석굴이 나타났고 그 터널을 지나자 그 절경의 용경협이 눈에 가득찬 기분을 느낄수 있었다.

 협곡의 길이는 약40Km이고(일부접근 금지) 수심은 평균 30m 깊은곳은 60m라고 한다. 용경협의 유람선 여행은 1시간 정도이며 절경사이를 유유히 지나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되고 약속된 시간은 협곡 비경에 취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만다.

 

8. 북경의 발맛사지

 

 용경협을 뒤로 하고 우리는 어제 우리들이 머물던 북경 숙소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석식으로는 북경에서 맛보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집이 었다. 한식집에서 맛있는 된장찌개와 김치를 대하게 되니 문득 고향에온 느낌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그집의 구수한 보리차 내음이 한국의 맛을 흠뻑 느끼게해 주었다. 북경 맥주를 한모금 하다보니 오늘하루 여행의 흡족한 기분이 마음에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오늘의 피곤을 풀기위헤 발맛사지 하는데로 장소를 옮겼다. 그곳은 지하에 설치된 곳으로 약간 습기로 축축하지만 중국소녀들의 정성스런 발마사지로(한실에 남녀 6명씩 입장) 피로가 한결 풀린것 같았다. 그리고 중국소녀들의 예쁜모습과 정성을 다하는 봉사에 나는 팁을 넉넉히 준비해 그 소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1시간 가량 발마사지를 마치고 숙소로 향해 깊은 잠을 청하기로 했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가방에 물건을 가득 가져와 관광객과 흥정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그곳에서 나는 진주 목걸이와 옥도장, 팔찌, 옥목걸이 등을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하고 늦은시간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가이드 소개로 시중보다 저렴하나 물건의 신용도는 알수없음)

 

 

9. 중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 천안문

 

 오늘 일정이 빽빽한 관계로 5 기상하여 6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버스에 올라 민주투쟁으로 유명한 천안문 광장으로 가기로 했다. 가는길에 버스창 밖으로 북경시민의 출근 모습을 보니 자전거 교통이 많고 빨간색 영업용 택시에는 손님과 칸막이가 되어있어 택시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되어있고 시내버스에는 여차장이 돈가방을 들고 승객들을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 꼭 70년대 우리 차장언니들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게 되었고 북경 시민들의 무표정이(내가 창밖에서 미소를 띄우고 먼저인사) 나로 하여금 딱딱한 사회주의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생각보다 뚱뚱한 사람이 적었고 교통질서는 상당히 무질서하며 양보의 미덕이 없는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각자 집에 전화가 적은 관계로 거리에 공중전화가 상당히 많은것을 볼수 있었으며 비교적 옷차림은 수수한 편이었다. 길가의 건축물들은 개인보다 정부에서 짓고 관리 하다보니 건축물 규모가 크고 웅장함을 느낄수 있었다.

 드디어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여 그 모습을 보니 중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느낄수 있었다.

 천안문 광장은 북경의 중심에 있으며 44만㎡의 규모로 (여의도 면적의 약 20) 50만명의 집회가 가능하며 지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민족정신의 메카로 중국내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좌측에는 인민대의사당이 자리잡고 있고 그곳에서 중국의 모든 정치회의를 주관하여 중국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뒷쪽에는 중국독립을 위해 죽은 열사추모의 영웅 기념비가 중국이라는 통일된 나라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영웅기념비 뒷쪽에는 모택동 무덤이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으나 우리같은 평범한 외국 관광객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측으로는 우리의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처럼 중국의 역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광장을 지나 지하 통로를 이용하여 천안문에 도착하자 모택동 초상화가 선명하게 그 모습을 나타냈다.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남문) 에 해당되는 문으로 기단에는 5개의 통로가 있으며 황제는 중앙에 있는 통로로 출입하였다 한다. 이 문은 명나라 영락황제때(1417)에 건립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그 후 1615년에 재건하면서 천안문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며 명, 청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칙서를 받는 의식이 이곳에서 행하여 졌으며 특히1949 91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선언문을 선포한곳으로 유명하다. (人民英雄 永久不壽라는 중국건국을 대표하는 글귀가 문앞에 큰 글씨로 걸어져 있다)

 

  ※ 천안문 사건

 

   1976년 4월5 1989년6월4 두차례 일어난 사건으로  문화 대혁명을 주

   도한 세력에 대한 비난과 반대로 민주화를 갈망하는 젊은 학생들이 맨손으로

   탱크와 맞서 싸워 오늘의 중국을 개방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고 그때 아까운

   젊은이들 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건 사건이다.

 

 

10. 거대한 중국의 황실 자금성

 

 민주화의 열풍이 가득한 광장과 천안문을 지나 자금성에 들어서니 중국황실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다물어 질줄을 몰랐다. 자금성은 명과 청나라의 역대 황제가 살던 황궁이며 동서로 750m 남북으로 960m 면적은 72만㎡( 22만평) 으로 방의수가 9999개이다.

 남쪽끝 천안문은 자금성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고 자금성의 입구인 오문앞 광장은 옛날 황제의 법정으로 황제가 법으로 백성의 죄를 집행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큰성은 여러개의 궁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어느 궁은 남쪽 운남성에서 가져온 72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궁으로 정말 웅장하고 놀라움 뿐 이었다.

이곳 자금성은 방이 9999개로 이곳에는 황제를 위해서 9000여 궁녀가 있었다 한다. 한방에 하루를 지낸다고 해도 28, 황제는 평생 외로운 생을 살았다 하는데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성을 애워싸고 있는 토성의 높이는 10m정도이고 토성 밖에는 말두필 넓이의 수로를 파서 외부로부터 침입을 경계했고 궁 밑의 바닥 지하에 뭍힌 벽돌의 높이가 무려 5m를 넘고 또한 궁안에는 나무 한그루를 심지않아 자객들이 은신할 처소를 제공하지 않았고 궁 밑으로 자객이 굴을 파서 침입할수 없도록 한것으로 보아 황제 자신도 백성들의 원성과 두려움을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궁옆 양쪽에는 대형 항아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화재시 화재로부터 응급대처하기 위해 항상 물을 가득채워 놓았다고 한다. 궁과 궁을 이어주는 황제가 다니는 길에는 대형 옥돌로 된 용형상 옥돌조각이 있는데 무려 그 크기가 세로 3.07m 가로 16.5m의 옥덩이가 1덩어리의 옥돌로 되어있다니 그 크기며 무게를 보아 어떻게 이 곳까지 운반되어 졌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루 2만명씩 28일동안 50km 거리에서 그 옥돌을 운반하기 위해 우물을 파서 길가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들어 밀어 운반했다고 한다.)

 황제는 중국의 56개 민족을 규합하기 위해 1년에2번씩 연회를 열어 이들의 마찰과 저항을 무마 시켰다고 한다.

 

11. 북경의 이모저모

 

 중국황실의 대단한 규모와 웅장함을 뒤로 하고 우리는 중국의 북경 한의과 대학 부설병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가는길에 북경의 주유소를 들려 기름을 주유하는데 여기서는 주유소를 석화집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북경에는 전철이 놓여있고 오차라는 뜨거운 차를 차통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나 오차를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큰건물 옥상에 LG간판이 우뚝하게 크게 설치되어 있어 정말 반가웠다.한의원에 방문하여 8층 로비에서 홍화차를 대접받고 양봉철이라는 한의사의 북경한방에 대한 소개를 듣기로 했다. 그분 고향은 강원도 양양으로 한국에도 여러번 다녀온 나이든 한방의 권위 있는 박사였다. (9세에 북경으로 이주)

 북경한의대학 부설병원은 1931년에 중국에서 제일먼저 생긴 병원이고 교수가 약2000여명 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유학생이 500여명이 되고 현재의 병원은 1951년 주은래가 건립했다고 한다.(현재 서당병원이라고도 함) 한방에서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사향노루를 직접 농장에서 기르고 있다고 하고 사향은 261종의 한방약에 사용된다고 한다. 특히 중풍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당뇨병에는 기름진 돼지고기를 삼가하고 오징어등을 먹지 말며 음식은 절대 과식하지 말고 아침에 적당한 운동과 채식을 주로 하는 식생활 습관을 가지라는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여러시간 여행을 하다보니 가끔은 식사시간이 기다려 지게 되고 반가운 점심먹을 시간이 되어 우리는 그 유명한 북경 오리구이를 시식하려고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국의 식사는 개인적인 식사보다는 여러사람이 같이 큰 원탁에 둘러앉아 모여 여러가지 다양한 요리를 비교적 싼값으로 즐길수 있다. 면류나 빵, 만두등은 비교적 맛이 담백하여 간단하게 요기를 해결할 수 있고 주로 기름에 야채와 고기를 볶아먹는 요리가 많고 중국의 향채를 넣어 독특한 향이 나게 되어 이 냄새 때문에 외국인인나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지만 이 향신료를 넣지 않도록 주문하게 되면 그런대로 맛있게 먹을만한 요리들이 많다. 음식점의 영업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그 시간이 지나면 음식을 팔지 않는곳이 많다.(아침 7:30~ 9:30, 점심 11:30~14:30, 저녁 16:30~18:30)

 중국에는 노점에서 파는 거리의 음식들이 많은데 일반 음식점보다 음식값이 훨씬 싸다. 대개는 약 10~15위엔 정도면 한끼식사를 거뜬하게 해결할 수 있다. 중국의 술로는 8대 명주라는 각지방의 고유한 술이 있는데 유사품이 많기는 하나 붉은 색으로 중국명주라는 표시가 되어 있으면 중국 당국에서 허가한 술로 믿을만 하다. 마오타이주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술로 귀주성에서 생산되는데, 알콜도수가 55도 이상이며 뒤가 깨끗한 술로도 알려져 있다. 소흥주라고 하는 술은 적화색의 옅은 색깔을 띠고 있는데 15~20도로 한국 청주와 비슷하다. (일반주로 가격이 비교적싼편)

중국의 맥주는 시중에서 파는 생수보다도 싸며 식당에서는 그냥 공짜로 준다. (청도 맥주 유명) 석회질이 많은 물을 마시다 보니 독일에서 일찍 맥주가 들어와 성행했다고 한다. 알콜도수는 한국의 맥주보다 약한편이나 맛이 좋은편 이다. 그리고 죽엽청 편주는 사천성것이 유명한데 소흥주에 다가 연한 대나무 잎을 넣고 빚은 술로 그 향기가 독특하다.

 식사때마다 중국에서는 여기 보리차 처럼 차를 주는데 한국에서 자스민차로 알려져 있는 마오리 화차와 오차가 주류를 이루고 황실에서 마셨다는 용정차.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즐겨 마시는 오룡차(우롱차라고도 함) 등이 있다.

 오리구이와 기름지고 맛있는 중국 점심을 마치고 청나라 말기 서태후가 기거하면서 중국을 막후에서 조정하던 이화원으로 향했다.

 

12. 화려함으로 가득한 이화원

 

 이화원은 북경중심의 서북쪽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290만㎡( 92만평 3/4가 인공호수)로 북경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수심은 평균 2m가량 되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인공호수를 낀 공원이다.  800년전 금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후 역대 황제들이 사용하여 왔으며 원나라 시대에 호수를 확장했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 서태후는 자신의 은익장소를 만들기 위해 1888년 군사적 증강을 목적으로 세운 막대한 예산을 유용하여 대규모 재건공사를 시행하게 되었고 이 공사에는 연인원850만명이라는 양민이 수탈되었다고 한다.  이호수의 느낌은 인공호수라 믿기지 않고 작은바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기만 하다. 이 호수를 판 흙은 옆에 큰언덕을 이루고 있는데 (산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음) 그곳에 사당을 지어 자기의 부귀영화를 빌었다 한다. 황제가 자기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6년간 공사로 완성한 곳이라니 그 당시 황제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것만 같다. 서태후가 산책하기 위해 만든 세계에서 제일 긴 복도(700m)는 그 한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양민이 수탈되었는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3. 중국 불교의 발원지 용화궁

 

 이화원을 나와 용화궁에 들어서니 그 절의 규모와 화려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용화궁은 중국불교의 발원지로 청나라 옹정황제(진시황제의 후손) 가 태평무사를 빌기위해 세운 절로서 라마교를 믿는 절이다. 중국의 4대 절중의 하나로 대웅전에는 큰 불상이 1개의 나무로 완성되어 있는데 무려 직경이8m 높이가 26m로 굉장히 큰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중 중국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분이 계셔서 저녁식사는 한국식당에서 냉면을 먹기로했다. 간판은 "연변복무호텔 냉면집" 이라는 곳인데 사장은 한국에서 온 한국인으로 이곳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소유를 허락하지 않아 명의로 된 사장은 조선족 중국인이라고 한다. 화장실은 향수를 사용하여 냄새가 적고(중국화장실은 악취가 심함) 비교적 청결한 편이며 이곳에서 북한 평양식 냉면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14. 만주벌판이 있는 연변을 향하여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연길로 출발하기 위해 북경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연길로 가는 비행기는 CJ6125편 북방항공으로 좌석6C번 앞좌석을 배정 받아 앉게되고 저녁 어스름에 이륙하여 하늘에서 고운 보름달을 ( 7 16)보게 되었다. 먼 이국땅 하늘에서 본 보름달의 모습으로 고향생각이 문득 나게 되었고 비행기속에서 잠시 사색에 잠기다가 중국시간 930분즈음 우리 일행은 연길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연길의 날씨는 북경의 날씨와는 다르게 약간 쌀쌀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 북한 뺏지를 단 북한 사람을 직접 보게 되여 "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면서 남한에서 온 여행객이라 이야기 하니 금새 얼굴에 미소가 가시는 모습을 보고 같은 민족인데 우리가 왜 이럴까 하는 아쉬움이 머리에 스치는 것 같았다.     

 추위로 잔뜩 움츠림 속에 어여쁜 조선족 가이드를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움츠린 마음이 좀 펴진 느낌이 들었다. 여산화원이라는 호텔에 들어서니 시설이 꽤 좋은 호텔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신축한지 1년정도 된다고 함) 종업원들의 미소와 친절함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곳에 오니까 매점 아가씨도 조선족,안내하는 아가씨도 조선족으로 한민족의 언어소통이 되다 보니 꼭 북한에 온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내일 6 기상. 6시30 아침식사. 7 출발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피곤함에 곧장 배정된 호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한뒤 침대에 누워 연변방송을 시청(이곳에도 KBS 뉴스방영)하고 있는데 지하 노래방에서 여흥을 즐기자는 일행의 전화를 받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노래방은 상당히 큰 홀로 (여기처럼 5~6명정도의 들어갈수있는 밀폐된 공간이 아님) 20~30명정도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으로 구식노래방 기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 못하는 김종환의 " 사랑을 위하여" 노래한곡을 선물한 뒤 곧바로 호실로 돌아와 깊은잠을 청했다.

 

15. 백두산 가는길의 모습

 

 9 4일 아침, 드디어 염원하던 백두산으로 가는날.. 아침 날씨는 제법 쌀쌀하고 약한 안개비가 왔지만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가벼운 산책을 하게 되었다. 호텔주변을 산책을 하고  세면을 한 후 짐을 꾸려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고 아침식사는 북경과는 달리 김치가 제공되어 있고 모든음식이 한국식으로 담백하고 정말 맛이 있었다. 후식의 커피값은 한화1600원으로 비싼편 이었다. 식사하고 출발하기 전 매점에서 간단한 기념품(북경보다는 싸다)을 구입하고 차에 승차하여 출발을 재촉하게 되었다.

 예쁜 가이드의 이름은 "이화" 나이는 28세 현재 연변대학 사회학과 3학년 학생으로 방학을 이용하여 아르바이트를 겸해 한국인들의 문화를 체험하고자 이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언니는 서울로 시집가서 잘살고있고 어머니는 수원에 기거하고 계신단다. 차창밖에 연길시의 풍경은 우리나라 70년의 모습이나 현재는 빠르게 개발되어 가고 있고 이 곳 날씨는 여름에는 무덥고(최고35℃ 가량) 봄 가을은 안개가 많고 낮에는 덥다고 한다 겨울에는 굉장히 추운날씨고 겨울이 비교적 길다고 한다. 연길시 중심에는 백두산을 상징하는 호랑이 조각상이 있는데 이 돌은 산동성 먼 곳에서 운반해온 돌을 현지에서 조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연변에는 유명한 축구팀이 있는데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팀명이 호랑이 팀이라고 한다. 우리 한민족의 용맹성을 중국에 알리고자 하는 열기가 팀명에 드러나 있는것 같아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연변(연길, 용정, 도문, 돈화, 훈춘, 화룡의 6개의 시와 그 지역) 에는 약 20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조선족은 854000명 정도이고 이 곳 연길시 인구는 약 34만명 정도라고 한다. 연길에도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이 많고 택시는 붉은색으로 이곳에서는 "도시의 아가씨"라고도 애칭하기도 한다. 이곳의 경제는 비교적 부유한 편으로 한민족의 부지런함을 볼 수 있고 논과 밭은 장기 임대하여( 50년정도 계약) 소출의 일부(세금) 를 제외한 모든 수확물을 개인이 소유하게 되어 열심히 일하여 소출이 많게 되면 경제적으로 부유를 누릴수 있게 되어 생산성이 향상 되었다고 한다. 주요 경작물은 쌀과 고구마,,옥수수,참깨 등이며 논보다 밭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왕창연 깨가 유명하다고 함) 요즘은 참깨등을 경작하여 경제적 효력이 큰 작물을 재배함으로 부를 축적하고 논과 밭은 기계를 사용치 않고 수작업으로 경작한다고 한다.(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를 수작업으로 한다 하니 놀랄 뿐이다. 이곳의 농기구 센타를 차리게 되면 수지 맞을것 같음)

 백두산 가까운 안도현은 인삼과 꿀이 많이 생산 된다고 한다. 인삼은 한국에서와 같이 시설재배를 하는게 아니라 산림지대의 키큰 나무 밑에 야생처럼 재배하여 그 독특한 향과 맛이 좋아 찾는 사람이 많고 꿀 또한 백두산 야생화의 여러가지 꽃속의 꿀을 모아 만든 꿀로 그 약효가 더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산하제한으로 한명의 자녀를 기르고 있으나 이곳 조선족은 산하제한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조선족 인구가 생겨 이곳 주권행사를 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백두산 가까운 곳은 산악지대이다 보니 탄광이 여러개 보이고 도시 연료로 갈탄(조개탄)을 사용하고 시골에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한다. (도시는 연한 아황산 가스로 가득하고 시골에는 집집마다 장작이 가득하다) 연길의 전화사정으로 휴대폰은 5명당 1대씩이고 전화는 가정당 1대정도 있다고 한다. (길가에 공중전화가 많이 있음) 이곳은 산악지대 임에도 불구하고 장묘문화로는 매장문화보다 화장문화가 발달되어 있어 묘소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연변의 학교는 조선인 자치구로 우리말로 교육하고 있으며 역사는 중국역사를 배우고 중국말은 한주에 2시간 정도 가르친다고 한다.

 중국에는 소수지역에 미인이 많고 연변쪽에는 조선여자가 미인이라고 한다.      (내눈으로 직접보아도 과연 조선여자가 미인)

 안도현이라는 곳에 다가올 즈음 포장된 도로 곳곳에 수금소라는곳(톨게이트)에서 통행세를 징수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로를 포장하는데 쓰는 경비를 통행세를 받아 충당한다고 한다. (터널 통과시도 통행세 징수) 긴 여정의 중간 휴게소에 내려 용변(소변)을 보게 되어 화장실에 가보니......(글 생략 하겠음..^^;;)  

 이곳 휴게소에서( 휴게소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잡상인 집합소라는 표현이 맞음) 인삼,장뇌삼과 토산품등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가격이 세곱절(사정없이 가격을 깎아야 한다)로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지 몰라 사지 않는 것이 한결 현명하다 싶었다. 이곳에서 북경에서와 같이 복숭아를 사서 먹어보니 북경보다 기온 변화가 뚜렷한 관계로 당도가 높고 맛이 있었다. 그리고 장뇌산삼이 우리돈 8000원 정도라고 하는데 산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어도 쉽게 그것이 산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개비와 흐린 날씨가 점점 맑게 개이기 시작했다.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다소 풀리기 시작했고 안도현 중간쯤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는 북한상품을 파는 상점에 도착하여 북한의 상품을 보기로 했다. 북한의 상품중 공산품은 품질이 떨어졌고 웅담의 약효는 상당히 좋다고 한다.(북한은 아직 야생 동물 보호 협정에 미가입) 그리고 북한 자수화는(96년 이후에는 생산을 안한다 함) 그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사람이 3년동안 제작한 자수 라고 한다. 이곳의 언어는 북한의 말씨로 북한이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말씨는 발음이 딱딱하고 원시적인 단어 표현으로( 팬티-으뜸가리개, 아이스크림-얼음보숭이 등) 재미있었다. 북한 언어는 6만단어가 주체어로 외래어가 거의 없었고 북한돈 100원은 노동자 한달 월급이라고 한다.

 이곳의 공기는 전혀 오염이 없는 관계로 상쾌하고 인삼 약재등을 알아준다고 한다. 조선족 가이드에게 남한과 북한에 대한 소감을 질문하니 조국이 통일이 되어 해외에 나와 사는 동포들의 정신과 마음의 고향이 되어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을 느끼며 살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빨리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한 생각이 되어 빠른 시일에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북한의 상품을 파는 안도현 민속촌은 서울 벽제 농협과도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그곳에서 이곳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도 지원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있어 그곳에서 이곳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도 지원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9월 말쯤이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백두산 관광객이 끊어지니까.)

 북한에서는 달러를 바꿈돈이라고 하며 북한 뺏지및 훈장은 반출이 금지되어있고 곡주생산이 안된다고 한다. 현재 연변 쪽에 숨어있는 탈북자는 약 5만명 정도이고 국경지역의 가출 어린이는 약 3000명 가량이 된다고 한다. 백두산 지역에는 산삼분포도가 넓고 장뇌삼 생산이 세계1위로 전량이 일본으로 반출된다고 한다. (장뇌삼은 인삼과 달리 단맛과 고소한 맛이 있다고함)

 백두산 가는 들녁은 벌써 길가에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있고 들판에는 곡식이 무르익어가고 벼들도 황금색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온도 차이가 심하여 이따금 비닐로 된 시설재배가 눈에 띄이고 해바라기도 대단위로 경작해 식량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곳의 조그만 시골은 TV에서 보던 북한의 모습과 비슷하고 오염이 덜 된 관계로 제비들(이제 강남으로 가기 위해 준비중)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백두산이 가까워져 오니 장백송(미인송) 군락이 눈에 띄이게 되었다. 하늘을 찌르는 반듯하고 기세 등등한 모습이 백두산의 정기를 머금은 듯 하였다.

 백두산 기슭 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닭 찜으로 내 놓은 요리는 담백하여 우리 시골 처가집에서 장모님이 삶아준 닭맛과 비슷했다. 산나물 무침도 맛이 있었고 두부 등 콩으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여기에서 백두산 입구까지는 30분 거리로서 기대감으로 내 마음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잣나무가 많아 가는길 곳곳에 잣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드디어 장백산 입구라는 글씨를보고 백두산에 도착됨을 알았다. 이곳에서 찝차를 이용하여 30분가량 오르면 이제 천지를 볼수 있다니 그 설레임에 잠시도 주체를 할 수 가 없었다.

 

16. 민족의 영산 그 白頭山의 감격!

 

 오후 3 5분전... 우리 일행은 각각 6명씩 찝차에 동승하여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꼭 찝차 경주라도 하듯이 등정을 시작했다. 찝차의 아슬아슬한 곡예 운행으로 백두산 기슭 기상대 까지 가서 이제는 도보로 천지를 눈앞에 두고 백두산에서 분출된 용암재를 밟으며 등정길에 올랐다( 정상은 기상대에서 40m정도)

 정확히 3시 40.

 그 감격이 거기에 있었다. 잠시 심장이 멈추어진 느낌이고 그 고요함과 신비 스러움에 나는 어찌할바를 몰랐다. (그 감격이 귀국하고 지금까지 그리고 한달 가량은 지워지지 않을것 같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한민족의 기원과 염원과 바램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 벅찬 감격이란... 천지를 두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눈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려 그 감격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이 올라간 곳은 기상대측에 있는 천문봉으로 해발2670m높이로서 천지 북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백두산은 중국과 한반도 일원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2744m 인 휴화산으로 산전체의 총면적은 8000㎢이고 백두산의 서쪽과 북쪽은 중국의 길림성에 속하고 동쪽과 남쪽은 북한의 양강도에 속한다. 백두산은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해발 2500m 이상인 봉우리가 16개이고 300여종의 희귀식물과 동물의 보고로 1980년에는 국제생물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우리가 올라간 천문봉은 1958년 백두산 천지 기상관측소를 세운뒤 기상대를 상징하여 천문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천지로 향한 " 천상은 병풍" 에는 오색 영롱한 비취 주옥들이 박혀있고 앞에는 수리 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여의주를 탐하는 외뿔 용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드는 듯한 용각봉이 있다.

 백두산 천지는 여러차례 화산폭팔과 함락에 의하여 이루어진 칼데라호(화산 분출 중심에 생긴 분화구)로 이곳에 강수와 용출수가 담수되어(용출수가62%) 압록강,두만강,송화강의 발원지이기도 하고 남북의 길이가 4.9km 이고 동서 길이는 3.5km 이며 호수 둘레는 13.4km나 되는 큰 산정호수로 평균 수심이 200m이며 가장 깊은 곳은 384m이고 총 저수량은 19.55억㎥ 이다.

 천지의 물은 장백폭포 쪽으로 흘러 내리는데 그 총 유량은 약 3866㎥ 이다. 천지 주변의 연 강수량은 1340mm 이며 연 강수 일수는 209일쯤 되고 7.8 월에는 거의 매일 비가 내려 맑은 날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10번 등정중 4번 천지를 볼수 있다고 함)

백두산의 연 평균기온은 -7.3℃ 겨울 최저 기온이 -44℃에 이른다고 한다. 백두산을 어떻게 나의짧은 어줍잖은 글로 표현할수 있겠는가. ( 눈을감고 그 모습을 상상에 맡기며 나는 백두산의 표현을 자제할까 한다)

 감격의 기쁨을 누리며 사진 몇장을 기념으로 남기고 우리는 아쉬움과 미련속에 천지를 뒤로 한채 나중을 기약하며 하산을 재촉했다. 찝차를 타고 백두산을 내려가면서 아름다운 고산 식물을 감상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는 찝차 승차 지점에 도착하게 되고 타고온 버스에 승차하여 장백폭포로 향했다.

 

17. 장백폭포에서 天地의 물에 마음을 담고

 

 백두산 입구 및 폭포근처의 화장실은 문이 없고 매우 작아 안이 다 보여 여자분들은 용변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백두산에서 가장 큰 폭포가 장백 폭포인데 높이가 68m로 여름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에 얼음과 눈속에서 폭포가 쏟아지고 있는것이 매우 장관이라고 한다. 폭포의 장엄함을 보고 폭포물에 물 수제비를 떠 그 물에 얼굴을 뭍고보니 천지속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듯 하였다. 폭포의 웅장함과 물소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유황온천물에 손을 넣어보니 그 뜨거움에 깜짝 놀랐다. 물온도가 약 82℃ 라고 했다. 그 물에 계란을 삶아 관광객에게 팔기도 했다. 나도 유황온천의 물로 삶아진 계란을 먹어보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아쉬움 속에 천지물 두병을 받아 백두산을 뒤로하고 숙소로 길을 재촉했다.

 

18. 백두산 밑 이도백하에서

 

 이곳 이도백하에 있는 신달빈관이라는 숙소는 내가 머물렀던 그 동안의 숙소에 비해 약간 시설이 떨어짐을 느낄수 있었으나 숙소의 물은 백두산 줄기의 물이라서 상당히 좋았다.

시장기를 느끼는 가운데,저녁식사를 맛있게 하고 밤거리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하여 가벼운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없고 오락실에 들어가보니 구식 오락기에 아이들이 심취해 있었고 머리 얼굴등이 깨끗하지 못하고 남루한 차림이었다. 거리의 식당은 한산한 편이었고 과일가게의 사과는 우리나라 사과에 비하여 1/3정도 크기로 매우 시고 맛이 없었다.

수박은 무등산 수박과 비슷하나 크기는 보통 수박 크기이고 이름도 모르는 과일이 제법 많이 있었다. (수박은 나중에 가이드가 사주어서 맛을 보니 시원하고 단백하여 맛이 있었다.)

 숙소에 들어와 채널 10번인 연변 방송에 채널을 고정하니 이곳소식과 한국소식을 접할수 있었다. 백두산의 감격으로 잠을 이룰수 없었다.  내일 가볼 용정과 도문을 기대하며 잠을 청한뒤 아침을 맞이했다.

 

19. 만주벌판과 용정

 

 기상시간은4. 세면을 하고 짐을 꾸렸다. 아침식사를 마친후 용정으로 가게 되는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우리 일행은 출발했다. 용정으로 가는 만주벌판은 들판이 끝이 없었고 언덕에는 온통 옥수수 콩 해바라기의 물결이었다. 거리의 고기판매는 냉장고속 같은곳에 보관하지 않고 기르던 가축을 그때그때 도살하여 평상에 좌판을 벌려 저울에 달아 파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집 모퉁이에는 코스모스와 과꽃이 수줍은듯 예쁘게 피어 있었고, 드 넓은 초지에는 이따금 풀을 먹는 소와 개울에는 오리들이 때지어 놀고 있었다.

버스 속에서 무뢰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가이드의 노래를 듣기로 했다.노래제목은 "백두산 노래"로 가사는

 

  " 나는 일어나리라. 그대가 북을 치고 노래하면 그때 우리는 조선의 먼동을 다

    시 보리라.나는 깨어나리라. 그대가 억눌려 신음하면 그때 우리는 조선의 먼

    동을 다시 보리라!" 

 

 정말 의미있는 노래 가사로 가이드를 졸라 그 가사를 적을 수 있었고 가이드의 소개로 나에게도 노래를 청했는데 일행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나의 직장에 대해서도 소개를 아끼지 않았다. 두만강가로 향하는 마음으로 김정구씨의 " 두만강 푸른물에 " 라는 노래를 일행과 같이 이국 땅에서 애틋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불렀다. 가는도중에 통행세를 받는 수금소에 수줍은듯 고개를 숙이고 발그레하게 핀 다알리아 모습을 보니 내 젊은 시절 동네의 수줍은 여학생 모습이 문득 생각이 나서 얼른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만주 벌판을 가로 지르는 철로가 있어 유심히 살펴보니 여기 침목처럼 평평한게 아니라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는 아아치 형상을 하고 있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 이유는 알수가 없다고 한다. 직선으로 된 철길에 대한 곡선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배려라고 나혼자 판단해 본다. 철길 옆에는 아직도 많은 초가집이 자리잡고 있으며 길가에 포플러는 옛날 시골 신작로 같은 느낌으로 어릴때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것 같아서 잠시 서정적인 마음에 사로 잡히기도 하였다.

용정 입구에 들어서니 조선천재 제2중학 이라는 간판의 학교가 보였다. 조선인의 긍지를 가지고 연변지구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포부가 깃들어 있는 좋은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열의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이곳에는 대파 농사를 많이 하고 있어서 우리 도시 부근에 향신료로 쓰는 채소가 많듯이 이곳도 신선한 채소를 빨리 공급하기 위해서 인가 보다.

 가는 도중 인평 수금소에서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분홍색 한복을 입은 신부의 수줍고 고운 모습에 젊음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라는것을 느끼게 되었다. 인평의 저금소(은행또는 금고)는 초라하기 그지 없었고 도시와 달리 시골에는 은행이 아직 활성화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중국사람과 연변 조선족 일부는 돈 또는 귀중품을 각자 소지하는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저금소가 잘 운영되지 못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용정으로 가는 넓은 벌은 금강벌이라고 하는데 가운데 젖줄인 혜란강이 흐르고 있다.

 용정시는 인구 22만으로 조선족이 52%을 차지하고 있고 거리는 깔끔한 편이었다. 연길에서 버스로 30분정도 소요된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 용정시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사과와 돌배를 접목시킨 사과배의 주산지로 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만부과원이라는 과수원이 눈에 띄이는데 무려 길이가 17km이고 넓이가 860ha 라고 한다. 이곳 용정은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이 문익환목사와 같이 대성중학교에 다녔으며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일제시대에 우리의 독립투사가 활동했던 곳으로 일송정,혜란강 의 선구자노래의 무대이기도 한 곳이다.

 혜란강에 놓여 있는 용문교를 지나 멀리 일송정을 바라보며 용정중학교에 도착했다. 용정중학교는 6개의 소중학이 합쳐져 지금의 학교를 이루고 있다. 이 학교는 남녀공학으로 100% 조선족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상당량의 장학금이 지원된다고 한다. 학교내력을 설명받고 방명록에 내 이름을 기록하고 적은 돈이지만 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탁하고 나서 그학교 학생과 기념사진을 찍고 공부 잘하여 훌륭한 인재가 되도록 나는 그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20. 곰농장과 두만강가의 감회!

 

 독립 열사들을 혼이 깃든 용정을 뒤로하고 동방곰낙원이라는 곳으로 우리는 이동했다. 나라에서관리하는 큰 회사로 700여 마리의 곰들을 사육하고 있으며 곰 쓸개즙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었다.살찐 곰들을 보며 이 곰들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하였다.

 곰 농장을 출발하여 1시간 30여분만에  두문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가는도중 공장의 굴뚝은 높고(연료로 석탄을 사용) 가동되는 공장이 그리 많지 않아 경제의 어려움을 실감할수 있었다. 그 옛날,혜란강 줄기에 발해를 꿈꾸던 애국 민족지사들의 피끓는 외침을 듣는것 같았고, 지금은 한가하게 목욕하는 학생과 낚시질하는 태공의 모습에서 그 꿈이 어디로 갔나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도문시의 백화점은 비교적 한산하였고 북한 물건이 많이 있는것 같았으며 길가에 하수도 공사를하는 모습을 보니 중장비는 없고 군인같은 장정들이 괭이로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문시의 길가 보도에는 흙길이 많아 시내에 먼지가 많았다.

 두만강은 길이가 521km로 한반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사이의 한반도와 국경을 이루며 흐르는 강으로 여진족과 관련이 깊은 강이라고 한다. 두만이라는 명칭은 여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보고도 갈수 없는 우리의 함경북도 땅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가까운 개울 하나만 넘으면 우리 강산인데 아쉬움이 가득하고 사진촬영 장소비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스런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했다.

 차라리 오지 말것을..... .

 강과 산은 변함이 없지만 이념의 벽 때문에 두절이 된 사람의 좁은 생각이 미웠다. 자연생태계의 새는 말없이 스스럼 없이 오고 가건만 우리는 가지도 오지도 못한다.. 빨리 좁은 생각을 버리고 한민족이 어깨를 마주하고 어울려 살았으면 한다..

 

21. 중국대륙과 아쉬움 속의 백두산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연길 공항에 도착하여 보니 비가 오는 관계로 심양행 비행기가 1시간 가량 연착이 된다고 한다. 비행기에 짐을 실으려고 하니 나는 배낭을 매고 가서 시건장치가 되어 있지않다고 하여 묶은 노끈 값을 3000원가량 지불하고 짐을 실을수 있었다.

 심양에 도착하여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귀향의 생각으로 잠을 청하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안개가 너무 많아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출국 비행기의 탑승이 걱정이 되었다.

 아침식사를 먹는둥 마는둥 하고 출국 수속을 마친 뒤, 공항매점의 기념품 가게를 돌아보았다. 공항 매점은 가격이 비쌀 뿐더러 할인이 되지 않았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 하던 중, 예쁜 조약돌이 바지춤에 들어가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다가 검색대에 적발되었다. 검색대 요원에게 사정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 할수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약간 나는 듯 하였다.

 드넓은 중국대륙을 지나 저 멀리 우리조국의 땅이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너무 반가웠다.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휴대폰을 켜고 집으로 전화를 걸려고 하는 순간에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넷을 통하여(http://www.airport.or.kr)우리 집사람이 나의 귀국일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도착 비행기시간,상태 등 모두가 인터넷에 나와 있더란다. (정말 인터넷의 힘은 무서워^^;;) 반가운 마음에 집 안부를 물어보고 고향으로 향하는 관광버스에 탑승하니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려 잔뜩 졸음이 왔다.

 인천 월미도에서 같이 여행을 간 일행들끼리 생선회와 늦은 점심을 들며 그 동안의 정담을 주고 받고 버스를 타고 피곤함에 졸다가 깨다 그리운 나의 집으로 도착했다.  이번 중국여행이 나에게 좋은 경험과 메마른 감정에 적지않은 소나기를 내려준 듯 하였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여행을 마감할수 있었다.

 

                                                                                                      2001.9